
[나병문 칼럼] 인공지능(AI)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세계 경제와 산업 지형을 크게 흔들고 있다. 2022년 ‘챗GPT 쇼크’에 이어 2024년 중국의 ‘딥시크 쇼크’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 기술의 혁신은 산업 판도를 전면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AI 기술은 이제 국가 전략의 핵심이자 국제 산업 경쟁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AI 혁명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AI 기술은 단순한 IT 혁신을 넘어선 범용기술(General-Purpose Technology)로, 군사·경제·산업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와 관련하여 김상배 서울대 교수는 “AI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된 기술이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쓰이는 ‘범용기술’이며 인간의 육체적 능력뿐만 아니라 지적 능력을 높여주는 ‘증강기술’인 데다가 경제와 산업 및 기타 사회 시스템 전반의 성장을 이끌어 가는 ‘선도기술’이다.”라고 밝혔다.
반도체 산업은 팹리스(Fabless, 반도체 설계), 파운드리(Foundry, 위탁 생산), 반도체 장비·소재 산업, 그리고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설계·제조 통합) 등으로 구성된다.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형을 살펴보면 미국은 팹리스 부문, 대만은 파운드리 부문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 부문, 일본은 반도체 장비 및 소재 부문에 경쟁력이 있다. 거기에 후발주자인 중국이 전 부문에 걸쳐 맹렬하게 추격 중이다.
AI 시대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은 반도체 기술이다. 특히 GPU(Graphics Processing Unit)를 중심으로 한 AI 반도체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반도체 산업이 CPU에서 GPU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국가 간 패권 경쟁도 격화되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NVIDIA)는 GPU를 주력 상품으로 내세워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하며 해당 산업의 지각변동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생존 전략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GPU 혁명은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PC 시대에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이, 모바일 시대에 애플이 주도권을 잡았듯이 지금은 엔비디아가 AI 반도체 분야의 선도 기업이 되었다. 엔비디아의 경쟁우위는 단순 하드웨어를 넘어선다. CUDA( Compute Unified Device Architecture)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소프트웨어 생태계와 최적화된 end to end 솔루션 분야에서 10년 이상 축적된 기술력이 독보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이자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현재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용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스템 반도체 설계 및 소프트웨어 생태계에서는 미국 기업들과의 격차가 크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대응이 시급하다. 이미 선두를 달리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의 우위를 지켜내면서, 경쟁국 대비 현저히 뒤처진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의 격차를 빠르게 따라잡아야 한다. 특히 AI 시대에는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최적화된 소프트웨어 솔루션과 생태계 구축이 필수적이므로, 이에 대한 전략적 투자 또한 시급하다.
먼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취약점인 설계 부문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다음으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국내 기업의 파운드리 사업이 TSMC와의 기술 격차를 줄이고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R&D 지원과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나아가 반도체 장비·소재 부문에서 일본과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관련 분야의 차세대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 역시 필수적이다.
정부와 국회의 역할 제고
현재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생사를 다투는 중대한 기로(岐路)에 서 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가 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기업에만 맡길 수 없다. 정부와 국회의 적극적이고 과감한 지원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장기적인 비전 아래 반도체 산업 생태계 전반을 강화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팹리스 산업 육성을 위해서,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를 위한 연구개발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관련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를 위한 인프라 확충에도 힘써야 한다. 반도체 장비·소재의 국산화율을 높이고,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 정원과 교육 프로그램도 확대해야 한다.
국회의 역할도 중요하다. 국회는 반도체 산업 역량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필수적인 법안들을 신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설계 및 개발 인력의 업무 특성을 고려할 때 유연 근무제가 필요한 만큼 ‘주 52시간 예외 반도체특별법’의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이는 특정 업체나 산업에 특혜를 주는 차원이 아니다. 국가 경쟁력 제고를 위한 결단으로 봐야 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한 번 낙오하면 회복이 어려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이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살아남고, 선도국으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기업과 정부 그리고 국회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정부와 국회는 반도체 산업을 단순히 기업 차원의 문제가 아닌 국가적 과제로 인식하고, 신속하고 과감한 정책 지원에 나서야 한다.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암울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적 역량을 최대한 결집해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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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나병문(rabmna1958@naver.com)
-전국퇴직금융인협회 금융시장연구원 연구위원
-SN경영연구원장
-경영학박사, 전 우리은행 지점장